#1. 첫 번째 관문: 살 것인가, 구독할 것인가
타이타늄 PC방 비밀 다락방에서 전율을 맛보고 집에 온 나는 일러스트 작업물을 보며 다시 의욕이 넘쳤다. 당장이라도 창문을 열고 날아오를 기세였다. 하지만 노트북을 켜고 검색창에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2020'을 입력하자마자, 나는 또다시 선택장애에 빠졌다.
"스탠다드? 디럭스? 프리미엄 디럭스? 게다가 스팀(Steam)은 뭐고 엑스박스(Xbox)는 또 뭐야?"
가격도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건 6만 원대, 어떤 건 10만 원이 훌쩍 넘었다. 100대 한정 장비 대여료는 껌값이었다. 나는 고민할 시간도 없이 티타님이 쇼핑백에 넣어준 '설치 가이드' 쪽지를 펼쳤다.
#2. 티타의 쪽지: 가성비 셋팅법
쪽지에는 티타 님의 글씨체만큼이나 시원시원한 솔루션이 적혀 있었다.
[필독] 호구되지 말고 읽으세요.
스팀(Steam)? 엑스박스(Xbox)?
게임을 평생 소장하고 싶거나 원래 스팀을 쓰던 '고인물' 유저라면 스팀에서 구매하세요.
하지만 카야 님 같은 '초보 찍먹파'라면? 닥치고 'Xbox Game Pass' 구독하세요.
'이유가 뭡니까?'
넷플릭스 알죠? 그거랑 똑같아요. 생맥주 한 잔 값(구독료)만 내면 시뮬레이션 앱들을 모두 맛 볼 수 있어요
[중요] 우리가 배울 '세스나 152(Cessna 152)'는 가장 싼 기본 버전(Standard)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굳이 비싼 거 살 필요 없어요. 나중에 재미 붙으면 그때 사도 안 늦습니다.
"아하, 넷플릭스처럼 구독해서도 할 수 있구나!"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안 그래도 조종장비 쇼핑하면서 지갑이 얇아졌는데, 10만원짜리 어려움 게임을 덜컥 사는 건 부담스러웠다. 첫 달 구독료는 심지어 할인 행사 중이었다.
"좋았어. 일단 한 달만 '찍먹' 해보는 거야." "혹시 수료까지 한번에 고고씽 쌉가능?"
나는 주저 없이 Xbox 앱을 깔고 구독 버튼을 눌렀다. 합리적인 소비자가 된 기분에 콧노래가 나왔다.
#3. 150GB의 위엄
결제는 1초 만에 끝났다. 이제 설치만 하면 된다. 하지만 '설치' 버튼을 누른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필요 용량: 152.4 GB 예상 소요 시간: 8시간 30분
"배... 백오십 기가? 내 노트북 하드가 500기가인데?"
숫자 단위가 비현실적이었다. 요즘 게임이 무겁다는 건 들었지만, 이건 게임이 아니라 그냥 지구(Earth)를 통째로 다운로드받는 수준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실제로 비행을 위한 전 세계의 지형 데이터를 받는 게 맞았다.
진행 바(Progress bar)는 거북이보다 느렸다. 1%... 2%... 노트북 팬이 비명을 지르며 돌기 시작했다.
#4. 낚였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갑자기 화면에 [설치 완료]가 떴다.
"어? 뭐야, 8시간이라며? 벌써 다 됐어?"
역시 스마트 한국의 인터넷은 빠르다며 환호성을 지르고 게임을 실행했다. 멋진 로고가 뜨고, 웅장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화면 중앙에 또 다른 창이 떴다.
[CONTENT MANAGER] Checking for updates... Downloading: 0 / 120 GB
"아니, 아까 설치한 건 뭔데!"
알고 보니 아까 설치한 건 비행앱 설치를 위한 런쳐 프로그램이었고, 지금부터 진짜 MSFS 2020 앱을 설치하고 있었다. 설치 중에 윈도우 창을 닫지 말라고 경고했다.
나는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오늘 비행은 글렀다.
#5. 기다림의 미학
나는 책상에 엎드려 깜빡거리는 다운로드 화면을 쳐다보았다. 지루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싫지는 않았다.
책상 위에는 티타 님이 잠시 써보라고 준, 3D 프린팅으로 만든 자작품 조종간이 놓여 있었다. 나는 다운로드가 되는 동안 조종간을 손에 쥐어보았다.
딸각, 딸각.
버튼을 눌러보고 스위치를 올렸다 내리고 스틱을 상하좌우로 돌리며 만져 보았다. 조종감이 내 맘에 쏙 들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색은 핑크빛인데.
모니터 화면 속에 다운로드 바가 차오르는 게, 마치 비행기의 연료를 채우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기다리는 것도 훈련인가'
150기가바이트. 저 엄청난 용량 속에 내가 날아다닐 하늘과, 구름과, 전 세계의 지형과 지물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니 흥미로웠다.
나는 조종간을 쥔 채 눈을 감았다. 저 게이지가 100%가 되는 순간. 나의 방은 더 이상 6평짜리 원룸이 아니다. 어디를 날아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