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암호문 같은 체크리스트
노트북 모니터 속의 세스나 152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다운로드한 pdf 훈련강의 자료에는 세스나 152의 시동절차가 있었다.
Master Switch ON, Fuel Valve ON, Mixture Rich, Throttle 1/4...
"하... 이걸 언제 다 하고 있어?"
어제 늦게까지 일러스트 마무리하느라 피곤했다. 비행기 띄우기도 전에 공부하다 잠들 판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디스코드 채널에 접속했다.
"레이 쌤, 이쯤에서 포기할까요? 시동 거는 순서 외우다가 머리 터질 것 같아요."
#2. 우리는 '메타파일럿'이잖아요
내 푸념을 들은 레이가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시작도 안했는데 포기할게 있나요?"
"카야 님! 왜 사서 고생을 하세요? 그건 실제 비행 학교 학생들이 외우는 거고요."
"네? 하지만 시동을 걸어야 날 거 아니에요."
"우리가 누굽니까? '메타파일럿'이잖아요. 시뮬레이션의 특권이 뭡니까? 귀찮은 건 생략하고 쉽고 재밌고 유익한 것만 쏙 빼먹을 수 있다는 거죠!"
레이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가득 묻어났다.
"카야 님, 지금 티타 님이 빌려준 조종간 잡고 계시죠? 거기 검지손가락 닿는 곳에 사각스위치 버튼 보이죠?"
"네, 보여요. 전원버튼 처럼 생겼는데..."
그게 바로 '마법의 버튼' 이에요. 복잡한 절차 다 무시하고, 엔진을 한 방에 깨우는 '자동 시동(Auto Start)' 기능을 그 버튼에 심어놨거든요."
#3. 쉬운 시동걸기
"정말요? 믹스쳐니 스로틀이니 안 만져도 돼요?"
"네. 그런건 저처럼 튜터 자격과정때 필요해요. 왕초보는 일단 프로펠러가 돌아야 신이 나죠. 자, 고민하지 말고 꾹 누르세요!"
나는 반신반의하며 조종간의 사각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꺼져 있던 계기판 스위치들이 알아서 탁탁탁 켜지더니, 믹스쳐 레버가 쑥 들어가고, 시동키가 저절로 끼릭 돌아갔다.
부르르릉-! 쾅!
단 3초 만에 엔진이 거친 숨을 토해내는 소리가 들렸다. 멈춰 있던 프로펠러가 힘차게 돌아가며 시야가 반투명하게 바뀌었다. 엔진의 진동으로 계기판이 흔들리는 것도 보였다.
"오... 되네! 이렇게 쉬운 걸 끙끙대고 있었다니!"
#4. 핵심은 'RPM'과 '오일'
프로펠러가 안정적으로 돌기 시작하자 레이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시동은 이렇게 편법으로 걸어도 돼요. 하지만 딱 두 가지는 꼭 확인해야 해요. 이건 생존이랑 직결된 거니까."
레이는 내 시선을 계기판의 특정 부분으로 유도했다.
"첫째, 저쪽의 RPM 계기의 바늘을 보세요. 너무 낮으면 엔진이 꺼지고, 너무 높으면 튀어나가요. 1000 정도에 안정적으로 머무는지 확인하세요."
"네, 1000 RPM 확인."
"둘째, 여기 보이는 오일 압력(Oil Press) 계기. 녹색 범위 안에 바늘이 들어와야 해요. 비행 상식으로 알아주면 좋아요. 계기가 비정상이면 하늘에서 엔진이 멈출거에요. 이정도 습관은 들여놓는 게 좋아요."
"오일 압력, 녹색. 정상이에요!"
"완벽해요! 복잡한 건 컴퓨터한테 맡기고, 카야 님은 비행기의 '건강 상태'만 딱 체크하시면 됩니다. 어때요, 참 쉽죠?"
#5. 춤추는 프로펠러
나는 돌아가는 프로펠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복잡한 기계 조작에 대한 스트레스가 사라지니, 처음 마음먹었던 비행의 설렘이 다시 시작했다. 눈앞에서 춤추는 프로펠러는 마치 나에게 "하늘로 가자"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쌤, 이제 날 수 있는 거죠?"
"그럼요! 엔진 깨웠으면 끝난 거죠. 자, 이제 활주로로 나가서 진짜 자유를 맛볼 차례입니다."
나는 스로틀 레버에 손을 얹었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비행기가, 버튼 하나로 내 마음대로 움직이니 친근해졌다.
메타파일럿? 아주 마음에 든다.